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의 시작 ===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 이후, 중국 도처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과 의문이 터져나오고 있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실패에 의기소침해진 중국 공산당의 사회 통제 역시 약해져서 공산당 입장에서 '유교적, 미신적, 봉건적, 비합리적, 외설적'이라 할만한 풍조가 곳곳에서 만연했다. 공산당이 극도로 탄압했던 불교나 기독교 등은 대약진으로 충격받은 신세대를 흡수하면서 크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미신이나 구습, 유교에 대한 중시 경향이 되살아났다. 대도시의 학생 세력들은 대놓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를 자처하면서 지도부를 비난했고 홍콩에 대한 망명도 줄을 이었다. 결국 느슨해진 사회의 나사를 조이고, 또한 자기 자신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을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국가주석 [[류사오치]]가 나섰다.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라는 것을 내세웠고 전국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수정주의자'와 '계급의 적'들을 축출하여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하였다. 이들 공작대는 전국 곳곳에 파견되어 많은 관료와 당원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수많은 사람을 숙청했다. 모든 성이 고발당하고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했다고 고발당했고 [[구이저우성]]은 아예 작은 타이완으로 규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7만 7천명이 사망하고 500만명이 처벌되었다. 한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의심하면서 그들이 중국의 흐루쇼프가 되어 자신을 중국의 스탈린으로 만들어 격하시킬 것을 두려워하던 마오쩌둥이 개입했다. 그는 류사오치의 조치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1965년 1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당 내부의 '주자파'를 잡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주자파란 당연히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봉건적인 경향이 많다는 이유로 문화 부문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고 젊은 학생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학생들이 [[홍위병]]이 된다. 그리고 [[해서파관 사건]]과 함께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이 반당파벌로 몰려 숙청되었고 마오쩌둥은 당, 정, 군에 스며든 부르주아 대변인과 흐루쇼프같은 자들을 숙청하라는 메시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펑전이 이끈 오인소조가 해체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중앙문화혁명소조가 탄생했다. 이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수장이 바로 [[천보다]]였다. 1966년 6월 1일 천보다가 [[인민일보]]에 논설을 발표, 모든 악마와 괴물들을 척결하라고 촉구하면서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학들이 고발되고 교사들이 반동파로 몰려 조리돌림당하고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이 시기에 각 지방의 공작대는 중앙과 당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생들을 우경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베이징에서만 1만명의 학생들이 처벌되었다. 이는 류사오치, [[왕광메이]], [[보이보]] 등의 실력자들이 마오쩌둥의 의도를 [[백화제방운동]] 때처럼 당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기 위한 것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목표는 바로 류사오치 등이었다. 1966년 7월 19일 마오쩌둥은 학생운동이 탄압되고 있다면서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천보다, [[장칭]] 등 중앙문화혁명소조가 나서서 류사오치에게 핍박받던 학생들을 옹호하고 마오가 학생들로부터 배우라고 했다면서 공작대를 비난했다. 7월 24일 마오쩌둥은 국빈관에서 당 지도층 인사들이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며 비판하며 공작대 해산을 요구했다. 공작대는 사과 성명 이후 해체되었고 학생들은 당연히 류사오치에게 적의를, 마오쩌둥에게 감사와 존경을 품게 되었다. 1966년 7월 29일 인민 대회당에서는 류사오치에게 숙청된 학생들이 복권되어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류사오치는 자신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늙은 혁명가라고 자아비판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는 늙은 혁명가가 아니라 늙은 반동이라고 비웃으면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했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